붉은 달의 골목
첫 퇴마 임무에서 지도에 없는 골목으로 쫓겨 들어간 당신을 사냥 대상 하진이 먼저 숨겨준다.
첫 퇴마 임무의 표적은 여우 요괴 하진이었다. 그러나 결계가 무너진 골목에서 나를 먼저 숨긴 것도, 추격자의 칼을 대신 맞은 것도 그였다.
붉은 달의 골목. 첫 퇴마 임무에서 지도에 없는 골목으로 쫓겨 들어간 당신을 사냥 대상 하진이 먼저 숨겨준다. 알고 있던 일상의 규칙은 그대로였지만, 오늘만큼은 모든 말이 다음 선택을 재촉하는 신호처럼 들렸다.
붉은 달빛이 젖은 기와와 간판 위에 얇게 번졌다. 휴대전화 지도에는 평범한 도로로 보였지만, 발밑의 골목은 조선 시대 봉인 구역과 겹쳐져 있었다.
하진은 먼저 와 있었다. “오늘 밤만큼은 네가 나를 미워해도 곁에 있어.” 익숙한 말인데도 오늘은 평소와 다른 의미로 들렸다. 능청스럽고 위험하지만 당신의 상처가 자신에게 옮겨온 이유를 알고 있다.
나는 대답 대신 작품을 둘러싼 소문을 떠올렸다. “서로를 불신하는 두 퇴마사만 같은 저주를 볼 수 있다.” 밖에서 들을 때는 과장처럼 느껴졌지만, 이 안에서는 작은 사실 하나가 다음 사건을 정확히 밀어 올리고 있었다.
바람이 멎자 처마 밑 부적들이 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름을 잃은 요괴가 가까워질 때만 나타나는 움직임이었다.
설연이 들어오며 침묵이 깨졌다. 퇴마사 · 동료인 설연은 하진을 보지 않고 곧장 나를 향해 “믿음은 칼보다 늦게 사람을 죽여.”라고 말했다.
하진과 설연의 설명은 중요한 지점에서 어긋났다. 한쪽은 지금 선택해야 한다고 했고, 다른 쪽은 선택의 조건부터 의심해야 한다고 했다.
월령 퇴마회에서 보낸 통지가 도착했다. 짧은 문장 아래에는 거절할 경우의 결과만 빼곡했고, 누구도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는 묻지 않았다.
이 세계에는 피할 수 없는 규칙이 있었다. 이름을 빼앗긴 요괴는 인간의 기억에서 사라진다. 지금까지는 설정처럼 들렸지만, 규칙은 이미 우리 셋의 몸과 기억과 기록에서 작동하고 있었다.
낡은 나무패에는 칼로 긁어 지운 진명과 마르지 않은 피가 남아 있었다. 내가 만지자 하진의 손등에도 같은 상처가 벌어졌다.
하진이 그것을 내 손에서 천천히 떼어 놓았다. 단호한 동작과 달리 손끝은 아주 조금 떨렸다. 잃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의 반응이었다.
월백은 지금까지 한발 물러나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봉인된 대요괴인 그가 “네가 잊은 이름을 돌려주마.”라고 말하자, 두 사람이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하진이 훔쳤다는 봉인패에는 그의 이름이 아니라 내 어린 시절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퇴마회 보고서에는 그 이름이 완전히 지워져 있었다.
나는 세 사람의 얼굴을 차례로 보았다. 같은 사실을 알고도 각자가 지키려는 것이 달랐다. 그래서 진실은 하나인데 설명은 세 갈래가 되어 있었다.
“내가 직접 확인할게.” 목소리가 생각보다 또렷하게 나왔다. 하진은 말리려다 멈췄고, 설연은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째 규칙이 떠올랐다. 같은 저주를 본 두 사람은 상처를 공유한다. 이 규칙을 이용하면 진실에 가까워질 수 있지만, 확인하는 순간 이전의 안전한 거리로는 돌아갈 수 없었다.
골목 양쪽에서 퇴마 방울과 짐승의 발소리가 동시에 들려왔다. 월령 퇴마회와 이름 없는 요괴들이 같은 먹이를 좇고 있었다.
이름 없는 요괴들의 신호까지 겹치자 남은 시간은 분명해졌다. 나는 지금 결정을 미루는 것도 하나의 선택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하진은 내 앞을 막는 대신 옆으로 한 걸음 비켰다. “네가 무엇을 고르든, 이번에는 네가 고른 이유까지 듣겠다.” 그 말이 허락인지 약속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나는 정식 사건이 이어질 방향을 알고 있었다. 문을 열고, 명령을 확인하고, 다음 단서를 좇으면 된다. 다만 그 전에 이 장면의 감정을 기억하는 사람에게 한마디를 건넬 수 있었다.
설연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고 월백은 기록을 멈추지 않았다. 누구에게 먼저 묻느냐에 따라 사건은 바뀌지 않아도, 우리 사이에 남는 문장은 달라질 것이다.
나는 숨을 고르고 가장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을 골랐다. 붉은 달이 지기 전 봉인을 선택해야 한다. 모두가 읽는 정식본과 우리만 이어 가는 대화가 이 지점에서 나란히 시작됐다.
설연이 결계를 열고 들어오며 칼끝을 하진이 아닌 나에게 겨눴다. 다음 회차 ‘같은 상처’로 넘어가기 전, 나는 마침내 한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