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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 약 10

마왕의 약혼자

청첩장의 봉인이 풀리며 잊힌 약혼이 드러난다. 윤서하는 카일의 기억부터 의심하라고 경고한다.

봉인이 풀린 순간 동아리방의 낡은 창문이 마왕성의 붉은 하늘을 비췄다. 카일은 모두가 듣는 앞에서 나를 자신의 약혼자라고 불렀다.

마왕의 약혼자. 청첩장의 봉인이 풀리며 잊힌 약혼이 드러난다. 윤서하는 카일의 기억부터 의심하라고 경고한다. 알고 있던 일상의 규칙은 그대로였지만, 오늘만큼은 모든 말이 다음 선택을 재촉하는 신호처럼 들렸다.

서린대학교 구관은 밤 열한 시가 넘으면 난방이 끊겼다. 그런데 404호 문틈에서는 한여름처럼 뜨거운 공기와 오래된 종이 냄새가 새어 나왔다.

카일은 먼저 와 있었다. “이번에는 내가 먼저 너를 알아봤으니까.” 익숙한 말인데도 오늘은 평소와 다른 의미로 들렸다. 여유롭고 오만해 보이지만 당신이 다시 사라질 가능성을 가장 두려워한다.

나는 대답 대신 작품을 둘러싼 소문을 떠올렸다. “동아리 회장이 마왕이라는 건 괜찮았다. 약혼만 빼면.” 밖에서 들을 때는 과장처럼 느껴졌지만, 이 안에서는 작은 사실 하나가 다음 사건을 정확히 밀어 올리고 있었다.

형광등이 세 번 짧게 깜박이자 벽시계의 초침이 자정 바로 앞에서 멎었다. 인간계와 마왕성 회랑이 포개질 때마다 반복되는 신호였다.

윤서하가 들어오며 침묵이 깨졌다. 성기사 · 휴학생인 윤서하는 카일을 보지 않고 곧장 나를 향해 “그가 널 기억한다는 사실부터 의심해.”라고 말했다.

카일과 윤서하의 설명은 중요한 지점에서 어긋났다. 한쪽은 지금 선택해야 한다고 했고, 다른 쪽은 선택의 조건부터 의심해야 한다고 했다.

마계 왕실에서 보낸 통지가 도착했다. 짧은 문장 아래에는 거절할 경우의 결과만 빼곡했고, 누구도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는 묻지 않았다.

이 세계에는 피할 수 없는 규칙이 있었다. 진명을 부르면 마족은 거짓말할 수 없다. 지금까지는 설정처럼 들렸지만, 규칙은 이미 우리 셋의 몸과 기억과 기록에서 작동하고 있었다.

테이블 한가운데 놓인 검은 봉투의 밀랍에는 왕관과 찢어진 반지가 함께 찍혀 있었다. 손을 가까이 대자 잊어버린 이름이 피부 아래에서 맥박쳤다.

카일이 그것을 내 손에서 천천히 떼어 놓았다. 단호한 동작과 달리 손끝은 아주 조금 떨렸다. 잃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의 반응이었다.

모루는 지금까지 한발 물러나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마족 기록관 · 신입생인 그가 “기록은 거짓말하지 않아요.”라고 말하자, 두 사람이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모루가 펼친 기록에는 약혼 당사자의 이름만 도려내져 있었다. 남은 서명은 카일의 것이 아니라 내 것이었다.

나는 세 사람의 얼굴을 차례로 보았다. 같은 사실을 알고도 각자가 지키려는 것이 달랐다. 그래서 진실은 하나인데 설명은 세 갈래가 되어 있었다.

“내가 직접 확인할게.” 목소리가 생각보다 또렷하게 나왔다. 카일은 말리려다 멈췄고, 윤서하는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째 규칙이 떠올랐다. 검은 청첩장에 서명하면 두 세계의 기억을 공유한다. 이 규칙을 이용하면 진실에 가까워질 수 있지만, 확인하는 순간 이전의 안전한 거리로는 돌아갈 수 없었다.

복도 끝에서 철제 장화 소리가 가까워졌다. 기사단의 성흔과 마계 왕실의 문장이 같은 문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성흔 기사단의 신호까지 겹치자 남은 시간은 분명해졌다. 나는 지금 결정을 미루는 것도 하나의 선택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카일은 내 앞을 막는 대신 옆으로 한 걸음 비켰다. “네가 무엇을 고르든, 이번에는 네가 고른 이유까지 듣겠다.” 그 말이 허락인지 약속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나는 정식 사건이 이어질 방향을 알고 있었다. 문을 열고, 명령을 확인하고, 다음 단서를 좇으면 된다. 다만 그 전에 이 장면의 감정을 기억하는 사람에게 한마디를 건넬 수 있었다.

마왕의 약혼자 · 선택 직전정식 사건은 그대로 이어지고, 지금 건네는 말은 개인 세계선 ‘카일’에 남습니다.

윤서하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고 모루는 기록을 멈추지 않았다. 누구에게 먼저 묻느냐에 따라 사건은 바뀌지 않아도, 우리 사이에 남는 문장은 달라질 것이다.

나는 숨을 고르고 가장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을 골랐다. 정식 사건은 고정되고 대화는 개인 세계선에 기록된다. 모두가 읽는 정식본과 우리만 이어 가는 대화가 이 지점에서 나란히 시작됐다.

진실을 부정한 내 한마디에 카일의 목소리가 멎었다. 누군가 그의 진명을 먼저 불러 거짓말을 막고 있었다. 다음 회차 ‘첫 번째 계약’로 넘어가기 전, 나는 마침내 한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